미술관소개


  • 소개
    1983년 12월 6일 경인 이금홍선생이 설립한 경인미술관은 서울의 한 가운데 종로구 관훈동 30-1에 자리하고 있으며 예술인의 문화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국내외인들에게 관광명소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총 약 550여평의 대지 위에 제1,2,3,5,6전시관과 아틀리에, 야외 전시장, 각종 행사를 할 수 있는 야외정원과, 전통다원으로 구성되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문화의 장소로서 미술인의 전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고, 또한 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로서도 이름있는 곳이다. 경인미술관은 6개 전시관에서 연중 계속되는 다채로운 전시는 물론 정원들 사이사이에 위치한 조각, 입체 및 설치 작품들로 인해 미술관내는 어느 한부분도 놓칠 수 없는 곳이다.
    봄, 가을에는 야외 콘서트가 열리고, 작가와 관객의 만남인 시연회도 이루어 질때도 있다. 미술관이란 어느 특정인의 장소가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장소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설립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 역사
    지방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던 한옥전시관은 조선조 철종의 숙의범씨(淑儀范氏) 소생 영혜옹주(永惠翁主)의 부마이자 태극기를 만든사람으로 유명한 박영효(朴泳孝)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속칭 서울의 8대가중 하나로 이름난 곳이었으나 현재는 남산골 한옥촌으로 미술관에서 기증·이전하여 보다 많은 시민들에게 조선시대 양반가의 건축양식을 둘러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전통의 계승
    전통의 느낌을 간직한 한옥전시관으로 사랑받고 있는 제3전시관은 본래 조선조 철종의 숙의범씨(淑儀范氏)소생 영혜옹주(永蕙翁主)의 부마이자, 태극기를 만든사람으로 알려진 박영효의 저택으로 유명하다. 경인미술관이 이 건물을 서울시에 기증하여 1996년 서울 정도 6백년 기념사업으로 남산골에 조성된 한옥촌으로 옮겨진 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축되었다.

    1977년 3월 17일 서울지방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된 바 있는 박영효의 저택은 1800년대에 지어진 목조건물로 고색창연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도심속의 명소로서 대지 2백79평에 건평 76.84평 규모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서울의 세칭 8대가 중의 하나였다. 이 집의 주인이었던 박영효가 철정의 부마로 권세를 날리던 시기에 사랑채로 쓰던 것으로 2천여평에 이르던 본채는 갑신정변 당시 불에 타 없어 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시대에 소유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갔다가 해방 후 이진승씨와 산업은행 사택 등으로 사용되었다가 83년 이금홍씨가 매입하여 일본인이 붙인 유리창과 연탄부엌 등을 뜯어내 원형을 살리고 주변에 정원을 조성하는 등 공을 들여 경인미술관 제3전시관로 사용해 왔다. 화강암을 기단으로 쓰고 있는 이 건물은 7량구조의 지붕틀과 마루밑에 환기공을 이룬 벽돌모양 등에서 독특한 전통미를 자랑하며 서울의 다른 가옥과 차별성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가옥은 원래 안채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행랑채 등으로 이뤄졌으나 안채만 남아있던 것을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기면서 사랑채와 별당채를 복원했다.



  • 박영효와 태극기
    박영효(朴泳孝, 일본식 이름: 山崎永春(야마자키 에이하루), 1861년~1939년)는 조선 말기의 급진 개화파의 주요 정치인으로 자는 자순(子純), 호는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이다. 노론의 실력자인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수원에서 태어난 박영효는 1872년 음력 4월 선왕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혼인하였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고, 금릉위(錦陵尉)에 책봉되었다. 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朴泳敎)를 따라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한 박영효는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고자 했으며, 이들 개화파가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과 문벌제도의 폐지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박영효는 조선총독부의 회유와 타협에 응하여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을 지냈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의 고문을 지내는 등 친일행각의 과거가 있기도 하다.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인 박영효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선박 메이지 마루[明治丸]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 태극사괘(太極四卦)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국기로 할 것에 의견을 모아 선상에서 이것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도일(渡日) 하기 전에 이미 조정에서 구상되고 논의되어 어느 정도 찬성을 본 것을 다소 수정한 것이며 태극기의 효시이다.

    태극기는 흰색 바탕에 기연 중앙에는 적색과 청색의 태극이 도안되어 있고, 사방 모서리의 대각선 상에는 건(乾)·곤(坤)·이(離)·감(坎)의 사괘가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태극은 우주자연의 궁극적인 생성원리를 상징하며, 빨간색은 존귀와 양(陽)을 의미하고, 파란색은 희망과 음(陰)을 의미하는 창조적인 우주관을 담고 있다. 사괘의 건은 천(天)·춘(春)·동(東)·인(仁), 곤은 지(地)·하(夏)·서(西)·의(義), 이는 일(日)·추(秋)·남(南)·예(禮), 감은 월(月)·동(冬)·북(北)·지(智)를 뜻한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태극기는 그후 널리 보급되었으나 도형의 통일성이 없어서 사괘와 태극양의(太極兩儀)의 위치를 혼동하여 사용해오다가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국기의 도안과 규격이 통일되었고, 문교부 고시 제2호(1949. 10. 15) 및 문교부 개정고시 제3호(1966. 4. 25)에 의거하여 '국기게양의 방법'이 공포·시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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